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임통치 청원 사건 (문단 편집) == 3.1 운동 이후 태도변화 == 3.1 운동 이전에는 안창호와 이승만 양쪽 다 위임통치청원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청원했다. 다만 3.1 운동 이후 양쪽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 [[안창호]]: 안창호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 국제정치변화를 감지하고 독립운동 노선으로 위임통치청원 노선을 골랐다. 위임통치 청원을 지시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러나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 노선에 대한 안창호의 생각은 크게 바뀌었다. 이전엔 위임통치청원에 따른 독립운동노선을 골랐으나 3.1 운동 이후에는 적극적인 투쟁 노선으로 전환했다.[* 김도형, 「안창호의 위임통치청원 관련 자료 검토」, 『한국근현대사연구』 68, 2014.3, 126쪽. 김도형 박사는 안창호가 노선을 전환한 사실에 대해 "그러한 것은 그 후 그의 독립운동 행적을 통해 증명이 된다"고만 말하고 그 이후는 설명을 하지않고 있는데 그건 이미 안창호에 대한 학계의 인식이 바뀐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미 학계에선 관련 연구들이 정리되었다. 이에 대해 정리한 교양서는 장석흥, 『안창호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참고.] * [[이승만]]: 이승만은 3.1 운동이 일어나자 미국 언론과 인터뷰까지 하며 적극으로 선전했다. 아울러 미국에서 끊임없는 언론 활동, 기고 활동, 인터뷰, 강연 활동을 통해서 3.1 운동의 참상을 미국인들을 비롯해 세계인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3월 16일에는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위임통치 청원서를 보냈다는 걸 밝혔다. 왜냐면 이승만은 3.1 운동을 자신의 지론(미국에 의지한 외교론 노선)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할 최상의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도형, 「안창호의 위임통치청원 관련 자료 검토」, 『한국근현대사연구』 68, 2014.3, 116쪽, 126~127쪽] 이 당시 이승만은 이 청원을 마치 자신이 주도했던 것처럼 선전했다.[* 김도형, 「안창호의 위임통치청원 관련 자료 검토」, 『한국근현대사연구』 68, 2014.3, 126쪽] 그러나 사실 위임통치청원에 사인할 때 이승만은 배경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했다. 이승만은 위임통치청원이 안창호의 지시였다는 것조차 몰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도형, 「안창호의 위임통치청원 관련 자료 검토」, 『한국근현대사연구』 68, 2014.3, 118~119] 정작 3.1 항쟁 이후 지시 당사자인 안창호에게 노선 변화가 생긴 것과 달리 안창호가 지시자였던 것도 잘 모르고 사인했던 이승만은 기자회견까지 하며 그 행적을 더욱 강조한 것이 아이러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